[A] 《그는 결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LIST / 20250724

 

( EP.  박사, 실버애쉬. Non-ship


 

《그는 결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실버애쉬는 조용히 말했다.

“박사. 우리는… 전에 만난 적이 있지.”

Seir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실버애쉬는 아주 미세하게 눈을 감았다.
마치 준비했던 대사를, 혼자 삼켜버리듯.

“그럴 줄 알았네. 하지만 괜찮아. 내가 기억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

“박사, 그대의 기술은 흥미롭군.”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어째서 그걸 로도스 너머로 공유하지 않는가?”

“그것은 로도스에 속한 생명을 위해 존재하지, 거래를 위한 조건이 아니다.”
Seir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실버애쉬는 미소 지었다.
“거래, 아니지. 난 단지, 당신이 어떤 생명을 선택해 구하는가가 궁금할 뿐.” 그 말에, Seir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너는 생명을 선택하나?”

“나는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감정을 쓰는 법을 안다.”
실버애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은, 그것조차도 봉인했겠지만.”

Seir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적 안에, 묘하게 ‘이해했다는 기척’이 떠올랐다.

그들은 서로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볼 수 있는 자들이었다.


1. 얼음 속의 대화

 

실버애쉬는 눈 덮인 발코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향은 늘 산맥의 공기 같았다. 정제되었으되 차갑고, 무언가를 감춘 채 풍겨오는 냄새.

“박사, 혹시 지금은 당신만의 시간이었나?”  그는 뒤돌아보며, 손에 들린 와인 잔을 내밀었다.

Seir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일정한 루틴 외에 ‘시간’이라 불릴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

“…과연. 그게 가능하다면 참 유용하겠군.”
실버애쉬는 가볍게 웃으며 난간에 기대었다.

“박사, 당신은 왜 여전히 로도스에만 머무는가?
세상에는 더 넓은 곳이 있고, 당신의 능력은 그보다도 넓은 가능성을 의미하네.”

Seir은 그를 응시했다.
“…넓다는 것은 반드시 안전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안전을 약속한 적은 없어. 다만 당신이 지키려는 것들이…
과연 그 안에 머물 수 있는가, 그게 궁금했을 뿐.”

잠시 정적이 흘렀다.
Seir은 돌아서며 조용히 말했다.

“넌 말 속에 조건을 감추는구나.”

“그대는 말 속에 감정을 지운다. 우리는 둘 다 무엇을 가리고 있는 셈이지.”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등을 보이며, 발코니를 떠났다.
그러나 둘 모두, 상대의 그림자를 의식하며 걸음을 늦췄다.


2. 피의 교차

 Seir이 들어섰을 때, 실버애쉬는 말없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낯선 기색 없이 Seir을 향해 말했다.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자만이, 권력을 쓸 수 있다.”
“…너는 그 말을 믿고 살아왔나.”

“오늘은 믿기로 했다.”

Seir은 말없이 무릎을 꿇고 혈청을 준비했다.
그의 손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러나 실버애쉬의 시선은 그의 손이 아닌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지금 당신이 쓰는 그 혈청… 대가가 따른다고 들었네.”
“그렇다.”

“…왜 계속 쓰는가?”

Seir은 멈추지 않은 채로 말했다.
“누군가가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 있는 증거는 사라진다.”

실버애쉬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그 뒤엔 묘한 연민과 경외가 겹쳐 있었다.

 

 3. 정적 속 협상

 

 

"이곳엔 감정을 숨기는 이들이 너무 많군."
실버애쉬는 말없이 앉아있는 Seir에게 말했다.
“당신도 그들 중 하나인가?”

“나는 숨긴 적 없다.” 

Seir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건 내 감정인가, 아니면 내가 지닌 능력인가?”

“그 둘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실버애쉬는 웃으며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는 사람의 능력은 감정에서 기인한다고 믿는다.
당신이 감정을 되찾게 된다면, 능력 또한 변화할 것이네.”

“…그 변화는 반드시 나아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대하고 있네. 감정 있는 박사. 그 모습이 얼마나 위태롭고, 인간다운지를.”

그 말에, Seir은 아주 미세하게 웃었다.
조금도 웃지 않았을 그의 입가에, 확실한 균열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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