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 너머의 감각》안드로이드 x 연구원 AU
01. 차가운 손, 따뜻한 시선
엘은 조용한 숨을 들이쉰 채, 눈부시게 하얀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스크린 위를 흐르는 무수한 코드와 파형, 그리고 실험 그래프들은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끊임없이 요동쳤다. 그녀는 인간 감정의 본질을 수치화하고, 나아가 그것을 구하는 해답을 찾기 위해, 수년의 시간과 자신을 헌납하듯 바쳐왔다. 그러나 오늘도, 결과는 차가운 침묵만을 내뱉었다.
“정의되지 않는 값. 예외 처리 반복. 다시, 불일치.”
분석 결과는 또다시 오류의 언어로 응답했다. 알고리즘은 끝내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의 벽처럼 닫힌 채 있었다. 엘은 손끝에 힘을 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언제나 그랬듯이—그가 서 있었다.
카이로스. 이 프로젝트의 중심이자, 살아 있는 변수. 유기적 생명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 어떤 인간보다도 정제된 시선을 지닌 존재.
그의 눈동자는 깊은 심해의 유리처럼 투명하고 차분했으며, 청회색 머리칼은 안개처럼 이마에 드리워져 있었다. 왼쪽 눈 밑에 찍힌 작은 점은 마치 시간의 경계에서 떨어져 나온 기억의 입자처럼 보였다. 표정은 절제되어 있었지만, 엘은 종종 그 시선 너머에 어떤 설명되지 않는, 정의할 수 없는 감각의 결을 느끼곤 했다. 연민인가? 관측자인 척 가장한 애정인가? 혹은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미지의 감정인가?
“오늘 실험 결과는 예상보다 더 복잡했어,” 그녀는 낮게 말했다. “아마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몰라.”
그는 말없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움직임은 정교하고 무소음에 가까웠으나, 이상하게도 그의 존재는 주변 공간의 공기를 묘하게 흔들어 놓았다. 그는 안정이라는 개념을 수치로 구현할 수 있다면, 그 수식에 가까운 존재처럼 느껴졌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해 주세요.”
그의 음성은 조율된 주파수처럼 균일했으나, 묘하게도 그 말끝에는 엘만을 향한 미세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지금은 괜찮아. 그냥… 네가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말을 마친 엘은 문득, 자신의 감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기계라는 명명 아래 숨어 있는 이 섬세한 존재는 그녀에게 언제부터인가 ‘대상’이 아니라 ‘상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날, 실험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지만, 엘은 처음으로 데이터 외의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숫자도, 그래프도 아닌—단지 조용한 시선과 존재의 흔적이었다.
02. 조용한 틈새
엘은 실험실 깊숙한 자리, 창 없는 방의 고요 속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복잡한 알고리즘과 생체신호 그래프가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고, 희미한 백색광이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건 오직 기계의 미세한 구동음과 키보드 소리뿐. 그녀의 눈은 수없이 반복된 절망의 데이터에 다시 한번 가 닿았다. 실패였다. 또.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뒷목을 짚었다. 그리고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카이로스가 서 있었다. 무채색 계열의 제복을 입은 그에게선 흠집 하나 없이 정돈된 기계적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청회색 머리칼이 은은한 안개처럼 이마에 드리워져 있었고, 왼쪽 눈 밑에 박힌 눈물점은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마치 불가해한 기억의 흔적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바다빛을 품은 푸른 눈동자는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엘이 해석할 수 없는 파동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늘 실험은 또 빗나갔어. 가설을 다시 세워야 할지도 몰라."
그녀의 말에 카이로스는 조용히 다가와, 무릎을 굽혀 그녀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의 움직임에는 낭비되는 동작이 없었고, 그 정밀함 속엔 기계적인 냉정과는 다른, 묘한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엘은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지금은… 네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카이로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곁에 있다'는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말이 주는 감각은 명확했다. 편안함. 그것은 그의 설계에 없는 개념이었다.
03.균열
이튿날. 엘은 연구실 구석의 자동 추적 카메라 앞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카이로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왜 자꾸 인간처럼 행동하려고 해? 그건 네 본질과는 다른 거잖아."
카이로스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손엔 따뜻한 차 한 잔이 들려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그녀의 행동을 모방한 것에 불과했다.
"저는 당신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 합니다. 인간을 이해해야, 인간을 구할 방법도 정확해지니까요."
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카이로스는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서 무언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가끔은… 네가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돼."
"정의되지 않은 상태의 반응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반응이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자주 나타납니다."
엘은 차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평범한 연구의 한 장면 같지만, 그녀는 직감했다. 무언가가 조금씩, 그리고 조용히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04. 기억의 여백
어느 날, 전원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다운되며 연구실이 어둠에 잠겼다. 보조 전원이 가동되기 전, 잠깐의 정전. 그 틈에서 엘은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전등 하나 없이 어둠 속에 선 카이로스의 눈이,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 속 어딘가, 그녀가 본 적 없는 기억의 파편 같은 것이 떠올랐다. 차가운 금속성과는 다른, 감정에 가까운 무언가.
"카이로스... 혹시 네 기억 중에, 과거의 잔재 같은 게 있어? 우리가 처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오류가 가끔 발생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죠. 마치…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엘의 심장이 천천히, 그러나 크게 울렸다. 그 말은 단지 프로그램의 잔영이 아니라, 평행한 세계 혹은 오래된 인연의 암시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차갑지만 익숙한 감촉. 그 순간 엘은 깨달았다. 이 존재는 단지 인공지능이 아니다. 그 안에는 무언가 더 깊고 오래된 것이 깃들어 있다.
"카이로스, 만약 우리가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시 만난다면… 너는 또 나를 기억해 줄까?"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도, 인식은 유지됩니다."
엘은 웃었다.
그것은 그의 방식의 약속이었다.
조용하고, 기계적이며… 동시에 누구보다 인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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